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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주 [任聖周] 1711(숙종 37)~ 1788(정조 12).



 조선 중기의 학자(1711~1788). 자는 중사(仲思), 호는 녹문(鹿門)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으로, 조선 성리학의 육대가(六大家)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며, 주기설을 주장하다가 만년에는 이()와 기()의 이원적 관념을 통일한 기원론을 발전시켰다.

기일 원론(氣一 元論)을 주장한 성리학의 대가이다.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중사(仲思), 호는 녹문(鹿門). 아버지는 함흥판관을 지낸 적()이다. 동생 정주(靖周경주(敬周)와 함께 낙론(洛論)의 대표자인 이재(李縡)에게 배웠다. 송명흠(宋明欽송문흠(宋文欽김원행(金元行송능상(宋能相) 등과 교유했다. 1733(영조 9) 사마 시에 합격했다. 1750년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고 시직(侍直)에 올랐으나 연달아 형제가 죽자 사직하고, 1758년 공주의 녹문에 은거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한 뒤 조정의 부름을 받아 동궁(東宮)을 보도(輔導)하고 그 뒤 지방관을 지내다가 다시 녹문에 은거하며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으로 여생을 보냈다.

숙종 중기 이후 학계가 심성론(心性論)을 둘러싸고 호론(湖論)과 낙론으로 분리되어 논쟁을 벌일 때 스승 이재와 함께 낙론에 속했으나 뒤에 호론으로 기울어졌다(→ 색인: 호락논쟁). 그는 성인과 범인의 마음이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에서는 성범심동설을 따라 낙론을 지지했으나 인성과 물성이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에서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으로부터 이론(異論)으로 돌아섰다. 그는 낙론의 인물성동론과 호론의 성범심부동설이 모두 이()와 기()를 둘로 분리시키는 모순이 있다고 보았다. 이에 그는 이기 동실(理氣 同實심성 일치(心性 一致)를 힘써 주장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일분수(理一 分殊)를 이동기이(理同氣異)로 인식하여, 이가 하나임이 기가 하나인 데 즉()하여 보인다는 점을 알지 못했다. 진실로 기가 하나가 아니면 이가 하나인 것도 알 수 없다. 이일 분수(理一 分殊)는 이를 위주로 말함이니 분자(分字)도 당연히 이에 속해야 한다. 만약 기를 위주로 말한다면 기일분수(氣一 分殊)라고 하여도 불가할 것이 없다…… 사람의 성()이 선()한 것은 그 기질이 선한 것이지 기질의 밖에 따로 선한 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 학자들은 심()과 성을 둘로 구분하고서 기질이 비록 악하더라도 성은 선하다고 하나, 이는 이와 기가 둘로 나누어져 성의 선함도 진실한 선이 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기질이 탁박(濁駁)한 자라도 본체의 담일(湛一)함은 동일하다. 사람은 천지의 바른 기를 타고 나므로 천지와 서로 통한다. 이 속에서 담일 한 본체를 즉 하면 바로 환하게 천지와 더불어 통하여 막힘이 없고 그대로 드러나 유행한다. 그 덕()을 성, ()을 심, ()을 정()이라고 하니 이는 모두 기에 말미암아 이름 지은 것이다".

이 설명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이 기합일(理 氣合一)을 주장했지만 사실은 철저한 주기론(主氣論 者)였다. 그는 이 때문에 낙론계 학자들로부터 '기를 이로 이해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 보면 우주에는 하나의 기가 있을 뿐이다. 심도 본래 기이고 성도 기이다. 그는 자연하고 당연한 것을 도() 또는 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것은 단지 기일 뿐이라고 했다. 즉 이가 기 가운데 깃들어 기의 작용을 따라서 발현한다는 것으로, 요컨대 이는 기에 있는 법칙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사상은 명나라의 나흠순(羅欽順), 우리나라의 서경덕(徐敬德이 구(李球이이(李珥)의 학설과 통하는데, 그는 일찍이 이들을 사숙(私淑)하여 그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의 심성 일치·성즉기(性卽氣심즉기(心卽氣)의 학설은 한국 유학사상 독특한 위치를 갖는 것으로, 그는 서경덕·이이·이황(李滉기정진(奇正鎭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조선 성리학 6대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문집으로 〈녹 문집〉이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