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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 족보(族譜)수보(修譜)연혁(沿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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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50회 작성일 23-11-05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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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 족보(族譜)수보(修譜)연혁(沿革)


우리 임씨 족보를 편찬한 일의 유래는 선현(先賢)들의 서술한 바가 갖추어져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 그 대략을 기술한다. 


염헌공(恬軒公) 우참찬(右參贊), 효문공(孝文公), 상원(相元)이신유보(辛酉譜) 서문에서 이르기를 [족보를 풍천 종인 집에서 얻어 보았는데 임도(任壔)가 기록한 한 권을 안동(安東)사는 종인 집에서 구하여 본 것의 기록과 또한 같아서 이로 미루어 증거 할 만한 족보가 옛날에 있었다]고 하였다.

 

처음 참판공(參判公) 금시당(今是堂) 의백(義伯)이 영남을 안찰 할 적에 가문을 번성하게 할 뜻이 있어서 간행하려 했으나 다 이루지 못한 채 부사공(府使公) 영(映)이 합천 수령이고 죽실(竹室) 효정공(孝貞公) 홍망(弘望)이 울산 수령으로 보책 간행을 합의했으나, 또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숙종 신유년(西紀 1681년)에 부사공(府使公)이 결의하여 정평부(定平府)에서 상 하편을 수보 하여 第一 차로 간행한 신유보(辛酉譜)(西紀 1681년)발행하였다. 


이제 그 제일 먼저 간행된 것을 보충하고 그릇된 것을 바로잡아 계속해서 2권을 완성하면서 호군(護軍) 준(晙) 이 찬집한 것을 의흥공(義興公) 경창(慶昌_)이 닦아서 윤문한 보책 이것이 바로 

第二 차로 간행한 해주보(海州譜)(西紀 1686년)발행하였다.

 

그 후 영조 계해년(서기 1743년) 증 찬성공(贊成公) 순(珣)과 승지공(承旨公) 사하(師夏)가 거듭 수보 한 보첩 단자를 상 하편으로 나뉘어서 편찬하기 시작했는데 완성되기 전에 두 분이 다 돌아갔다. 정해년(서기 1767년)에 이르러 전에 모아둔 단자가 오래되었으므로 다시 새로 단자를 수집했다. 

부여공(扶餘公) 매(邁)와 지평공(持平公) 선(珗) 직장공(直長公) 희성(希聖), 아산공(牙山公) 시습(時習)이 함께 구일을 관장했다. 

지평공은 상편을 편수 항 제 탈고를 다 못하고 돌아갔다. 

직장공이 계승해서 사업을 전개할 적에 발표한 법례는 대개가 직장공이 직접 전한대로였다. 

한편 부여공 아산공 두 분에게 위촉하였는데 완성이 안 된 채 두 분 모두 돌아갔다. 

계묘년(서기 1783년) 에 직장공이 또 돌아간 뒤 3년 만에 교리공(校理公) 희우(希雨)가 비로소 결의하여 족보 간행에 들어갔다. 

명하전을 거두어 상편은 인쇄하여 완성하고, 한편의 초고를 다시 영서공(領西公) 노(魯)에게 위촉해서 수정하여 인쇄하다가 절반 작업도 안된 채 교리공이 또 돌아갔다. 

정조 갑인년(1794년) 종회에서 교리공의 아우 희양(希養)에 그 일을 바꾸어서 하게 했다. 그러나 물자와 재력이 부족하여 일이 오래도록 안 되기로 병진년(서기 1796년)에 이르러 종중에 서한을 발송하여 주제를 정하고 협조자와 수요 되는 물자와 재정을 협의 처리하였다. 

나주공 육(焴) 정읍공 희묵(希默)이 앞장서고, 평안 병사 율(嵂)과 안변의 희후(希厚), 伊川의 희존(希存), 북청의 희원(希遠)이 아울러 각각 재물을 내었다. 

현감공(縣監公) 호상(好常)은 족보 간행하는 일을 주관하고 교리공 천상(天常)은 교정을 맡았다. 

정조 정사년(서기 1797년) 족보가 간행되었는데 바로 이것이 第三 차로 간행한 정조정사보(正祖丁巳譜)(서기 1797년) 발행하였다.  



철종 갑인년에 좌윤공(左尹公) 백은(百溵) 판서공(判書公) 태영(泰瑛) 삼탄공(三灘公) 정모(正模 )총관공(總管公) 홍준(弘準) 승지공(承旨公) 헌대(憲大) 제공이 앞장서서 파보를 내기로 한 지 四 년만의 먼저 완성한 것이 바로 중파가 만든 후정사보(後丁巳譜 :서기 1857년)다. 


고종 갑술년(서기 1874년)에 이르러 판서공(判書公) 담재(澹齋), 응준(應準), 참찬공(參贊公) 녹은(鹿隱) 상준(商準), 참판공(參判公) 자계(慈溪) 효준(孝準) 등이 합간(合刊)할 것을 창의하였으나 또 뜻을 얻지 못하다가 계미년(1883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음을 알렸는데 이것을 백파의 갑술보(甲戌譜)다. 


그 후 고종 경자년(서기 1900년) 에 군수 백용(百溶) 금천공 영호(榮鎬) 제위가 다시 합보 할 것을 의논하고 해를 넘겼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갑인년 (서기 1914년) 겨울에 향관(餉官) 형준(炯準)이 거듭 수보사(修譜事)를 경영하려 했으나 각각 사세(事勢)로 말미암아 또한 합보 함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병진년(서기 1916년)에 이르러 파보가 완성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중파의 병진보(丙辰譜)다. 


그 후 갑자년에 백파 교관(敎官) 인호(寅鎬)가 거듭 중수(重修) 간행할 것을 앞장서서 해를 넘겨서야 이룩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백파의 갑자보(甲子譜)다. 


무인년(1938년) 봄 중파 향관 형준(炯準)과 백파 참봉(參奉) 항재(恒宰 훈도(訓導) 星彬등이 또 계속 추진하기로 앞장서서 합보 할 것을 의논하고 나서 사정이 각각 다름으로 인하여 단합됨을 얻지 못하자 정성을 한결같이 하여 양파에 균등하게 위촉하여 추진하였으나 역시 합의를 하지 못한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었다. 


이하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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