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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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 부원군파(府院君派) 시조(始祖)의 휘(諱)는 자송(子松) 이시다. 


어사대부의 슬하에는 자송(子松)과 자순(子順) 두 아들을 두셨으며 이 대()에 이르러 백파(伯派)인 자송(子松)과 중파(仲派)인 자순(子順)으로 분파된다. 그래서 흔히 백파를 부원군파(府院君派), 중파를 전서공파(典書公派)라고 호칭한다.

 

임자송(任子松)(백이정(白㶊正)의 문인(門人)으로 조적(曺頔)의 난() 때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亂功臣)에 올라 서하부원군(西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임자순(任子順)은 통정대부(通政大夫 : 3품의 관계)로서 민부전서(民部典書 : 호조의 정 3품벼슬)를 역임하였다.

 

임자송(任子松)3세손 임구(任球) 고려말 이성계의 스승을 지낸 뒤 조선 초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의 직관을 역임했다

그의 묘는 경기도 연천군 중면 합수리 621번지에 있는데 무학대사가 묏자리를 선정하였다고 전해진다.

 

임자송(任子松)6세손인(임원준(任元濬)은 당대의 명관(名官)으로 시()와 문장(文章)이 뛰어나 명성을 얻었으며,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고 서하군(西河君)에 봉해진 후 좌찬성(左贊成: 의정부 소속의 종1품 벼슬) 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임사홍(任士洪)은 한어(漢語)에 정통하고 해서((楷書)에 뛰어났으며, 두 아들 임광재(任光載: 현숙 공주와 결혼)와 임숭재(任崇載:휘숙옹주와 결혼)가 각각 조선(朝鮮)의 예종(睿宗)과 성종(成宗)의 부마(駙馬)가 되었다.

 

 임자송(任子松)8세손인 임윤(任尹)의 아들로 영의정(領議政)을 추증받은 임국노(任國老)의 아들 임몽정(任蒙正)은 대사성을 지냈고 그의 조카 임유후(任有後)는 도승지(都承旨)만휴당집(萬休堂集)’이란 명저를 남겼다. [목동가(牧童歌)]를 지은 임유후(任有後)도 예조 참판(禮曺參判). 관찰사(觀察使). 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임자송(任子松)8세손인 임 열(任 說)은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에 이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한성부 으뜸벼슬로 정 2) 을 역임하였고 임열 (명종조 한성판윤(漢城判尹)의 후손 임숙영(任叔英(인조조ㆍ지평(持平), 임의백(任義伯(효종조ㆍ공조참판(工曹參判), 임방(任埅) 경종조ㆍ우의정(右議政), 임승(任陞) 등도 학문 또는 벼슬로 유명했다.

특히 임의백의 현손 임성주ㆍ임정주 형제는 임 씨가 낳은 대표적인 성리학자다. 임성주(任聖周)(숙종 27정조 12) 는 율곡(栗谷)의 학풍을 이은 주기(主氣) 철학의 거봉이다. 경학과 성리학을 규합해 주기설(主氣說)을 확립하고 녹문집(鹿門集)’을 남겼으며 조선 성리학 6대 가의 하나로 손꼽힌다.

 

임정주(任靖周)는 정조의 스승으로 정치ㆍ경제ㆍ군사ㆍ역사를 강론했으며 정조가 당대의 석유로 정주뿐이라고 칭찬했을 정도였다 한다.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의 누이 윤지당(允摯堂) 임 씨는 여류학자로 유명하다.

 

한편 17세기 후반 임열(任說)의 증손 남곡 임한백(任翰伯)은 인조현종 대에 8문장의 하나로 손꼽혔으며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임상원(任相元)도 당대의 대문장가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갈 때 배종(陪從)한 뒤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효종실록(孝宗實錄)] 편찬에 참여한 임한백(任翰伯). 문장과 글씨가 탁월하고 경사(經史)에 정통하여 명성을 얻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르고 풍천임씨의 가세(家勢)는 여기서 끓이지 않고 계속 되였는데, 근세(近世)의 명필(名筆)로 형조 참판(刑曹參判). 도승지(都承旨)를 지낸 임수적(任守迪), 대사헌(大司諫)으로 고금의 시가(詩歌) : 가사를 포함 한 시. 문학의 통칭) 에 통달하고 글씨에도 능하였던 그의 아들 임정(任珽), 그리고 조선조(朝鮮朝) 성리학(性理學 : 주희에 의해 완성된 송대 유학의 한계통)6대가(大家)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임성주(任聖周)와 일원적(一元的) 관념(觀念)으로 주기설(主氣說)을 확립한 임정주(任靖周)는 형제(兄弟) 학자로서 당대에 뛰어난 인물(人物)들이다.

 

 16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접어드는 3백여 년 동안 13세손 임명필의 세 아들 임윤(任尹)ㆍ임열(任說)ㆍ임려(任呂) 3형제에서 비롯되는 학풍은 임성주(任聖周) 형제에 이르러 극치를 이뤘으며 사림을 풍미하게 된다.

 

임사경(任思敬)의 자()는 여직(汝直)으로 학자(學者)이다. 숙종 42년 스승 윤증(尹拯)이 화를 입자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심하여 삼분(三墳)≫≪오전(五典)을 깊이 연구했다. 뒤에 학행으로 추천되어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세자익위사부솔(世子翊衛司副率)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시문(詩文)사기(史記)에 밝았고, 성력ㆍ도수ㆍ병기ㆍ이치 등에도 정통했다.

 

임 정(任珽)의 자()가 성방(聖方)이다. 경종(景宗) 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사관(史官)에 뽑혔다가 영조 4년 지평(持平)이 되었다. 그 후 교리(校理)ㆍ수천(修撰) 등 여러 청환 직을 거친 뒤 진하(進賀) 겸 진향사(進香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응교(應敎)ㆍ집의(執義)를 지낸 뒤 다음 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 그 후 우부승지(右副承旨)ㆍ이조참의(吏曹參議)ㆍ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고,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시가(詩歌)에 통달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임윤지당(任允摯堂)의 호()는 윤지당(允摯堂)이며 여류 문인이다. 임적(任適)의 딸로 신광유(申光裕)의 부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성리학(性理學)에 통달했다. 정조 20년 동생 임정주(任靖周)와 시동생 신광우(申光祐)가 유고를 정리하여 윤지당 유고(允摯堂遺稿)2()을 간행했다.

 

임성주(任聖周)의 자()는 중사(仲思), ()는 녹문(鹿門)으로 학자(學者)이다. 영조 9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를 거쳐 시직(侍直)을 지내고 공주의 록문(鹿門)에 은거했다. 정조가 즉위하자 불리어 동궁(東宮)을 보도(輔導)하고 뒤에 지방관(地方官)을 지내다가 다시 녹문(鹿門)에 은거하여 학문으로 여생을 보냈다. 조선 성리학 6대 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임성주(任聖周)의 문인(門人)으로 그의 주기론(主氣論)을 계승했다.

 

임정주(任靖周)의 호()는 운호(雲湖), 시호(諡號)는 문경(文敬), 학자(學者)이다. 영조 38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동몽교관(童蒙敎官)을 거쳐 시직(侍直)을 지내고, 서연관(書筵官)으로서 世孫(正祖)을 보필하여 학문(學問)을 강론했다. 뒤에 정조가 즉위한 뒤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ㆍ온릉령(溫陵令)ㆍ청산현감(淸山縣監) 등을 역임했다. 형의 임성주에 학문을 이어받아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임상원(任相元)은 자()가 공보(公輔)이다. 현종 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하고, 사서(司書)를 거쳐 숙종 5년에 청풍부사(淸風府使)로 있을 때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이어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동지부사(冬至府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홍문관(弘文館)ㆍ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공조(工曹)ㆍ형조판서(刑曹判書), 우참찬(右參贊)ㆍ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ㆍ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했다. 효문(孝文)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임수간(任守幹)의 자()는 용예(用譽)이다. 숙종 20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정언(正言)ㆍ교리(校理)ㆍ부수찬(副修撰)을 역임했다. 이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고, 검토관(檢討官)ㆍ수찬(修撰)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뒤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갔다가 다음 해 귀국,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내고,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경사에 밝았으며, 음률ㆍ찬수ㆍ병법ㆍ지리에도 정통했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임한백(任翰伯)의 호()는 남곡(南谷)이다. 인조 20년 무년문과(武年文科)에 장원하고, 지평(持平)ㆍ정언(正言) 등을 거쳐 사서(司書)로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갈 때 배종(陪從)했다. 다음 해 돌아와 지제교(知製敎)가 되고, 그 후 수찬(修撰)을 거쳐 교리(校理)로서 춘추관사관(春秋館事官)을 겸임하여 효종실록(孝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뒤에 길주목사(吉州牧使)로 나갔다. 시문에 뛰어나 8문장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임 방(任埅)은 자()가 대중(大仲), ()는 수촌(水村)이며, 문희(文僖)라 시호(諡號)된 분이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후 현종 12년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내외직(內外職)을 거쳐 숙종 15년 호조정랑(戶曹正郞)이 되었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고 송시열(宋時烈)이 유배되자 사직했다. 그 뒤 인현왕후가 복위된 후 군자 감정(軍資鑑定)ㆍ단양군수(단양군수)ㆍ사옹원첨정(司饔院僉正) 등을 역임하고, 63세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장령(掌令)이 되고, 그 후 대사성(大司成)ㆍ승지(承旨) 등을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경종 1년 우참찬(右參贊)에 승진했으나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유배되었다.

 

임 노(任魯)의 자()는 득여(得汝), ()는 영서거사(穎西居士)이며 학자(學者)이다. 학문에 전심하여 여러 번 관직에 가용 되었으나 불응하다가 순조 9년 제용감부봉사(濟用監副奉事)가 되었고,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ㆍ사복사주부(司僕寺主簿)ㆍ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등을 거쳐 신령현감(神靈縣監)ㆍ충원현감(忠原縣監) 등을 지내면서 간악한 서리(胥吏)들을 숙청하고 토반(土班)의 횡포를 억제하여 질서를 바로잡았다.

 

임백경(任百經)의 자()는 문경(文卿)이며 문정(文貞)이라 시호(諡號)되었다. 순조 27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헌종 5년 충청좌도암행어사(忠淸左道暗行御史)가 되었다. 뒤에 홍문관(弘文館)ㆍ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을 역임하고, 철종 7년에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그 후 수원부유수(水原府留守)를 지내고,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고종 1년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찬성사 임자송(任子松) 후손 우의정 문정공 하의 임백경 선조 한성판윤 문정공 죽애 임열(任說) 가문 성리학 6대 가의 일인 임성주, 형조판서 임상원 임상준, 공조판서 임방 이응준, 예조판서 임희증 임희존, 학자 임정주, 임노, 임적, 임희성, 서울시장 3선 국회의원 임홍순, 문화방송 전무 임택근, 기아 그룹 서진산업 사장 임영순, 대우 전무 임효빈 등이 가문을 빛낸 뛰어난 인물(人物)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