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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계서당(梧溪書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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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28회 작성일 24-01-16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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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계서당(梧溪書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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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계 서당은 본래 강와(剛窩) 임필대(任必大 : 1709~1773)가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건립했던 사당으로, 임필대가 사망한 후에는 그를 제향하기 위해 오계사(梧溪祠)를 세웠다. 그러다가 대원군 때 훼철된 후 다시 서당 형식으로 건립한 건물이다.






오계서당기(梧溪書堂記)


의성군 금성면 구련리 풍천임씨 강와 임필대

 

 귀산(龜山)에 서실(書室)이 있은 지는 오래 되었다. 찾아볼 만한 문헌이 없으므로 언제 지어졌고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옛 터는 지금까지도 완연하다. 옛날에 거문고를 연주하고 글을 익히던 지역이 사슴들이 풀을 뜯어먹는 곳으로 바뀌고 안개에 잠기고 풀에 묻혀서 보는 이들이 상심하고 탄식하였다. 이 고을에 사는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서실을 다시 일으킬 뜻은 있었지만 아직 실행하지 못하였다.

1735(영조 11) 가을에 내가 몇몇 뜻을 함께 하는 이들과 중건하기로 모의하고 각각 차등을 두어 자금과 곡식을 내놓았다. 이듬해 1736(영조 12)에 관찰사에게 아뢰어 40말의 곡식을 얻어 몇 년에 걸쳐 경영하여 조금 두서를 갖추었으니 학사(學舍)를 짓는 일을 때에 맞게 하여 놓쳐서는 안 될 것이었다. 다만 옛 터가 인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서 형세로 볼 때 불편한 점이 있었다. 이에 원당(院堂) 고을로 옮겨서 짓기로 하였는데, 그곳은 형국이 그윽하고 지세가 막혀 있으며 산이 겹겹으로 우뚝하게 둘러있으며 시냇물이 잔잔히 흘러서 속세의 시끄러운 일이 애시당초 간섭할 수 없는 곳이요 별천지였다. 이에 1742(영조 18) 109일에 터를 닦고 일을 시작하여 이달 24일에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렸는데, 자금과 힘이 모자라서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집은 모두 9칸으로 규모가 매우 검소하다. 가운데는 남향하여 4칸을 열어서 정당(正堂)을 만들고 동쪽과 서쪽의 익랑(翼廊) 또한 모두 4칸이다. 건물이 이루어지고 난 뒤 정당에는 회보당(會輔堂)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니, 논어(論語)벗을 모으고 인을 돕는다[以文會友以友輔仁]’라는 뜻에서 따왔다. 동재(東齋)에는 존성재(存省齋)라는 편액을 걸었으니, ‘정할 때엔 존양(存養)하고 동할 때엔 성찰(省察)한다[靜存動察]’는 뜻에서 따와서 학자들이 몸과 마음을 서로 기르는 공부로 삼도록 하였다. 서재(西齋)에는 홍밀재(洪密齋)라는 편액을 걸었으니, 장재(張載)문장은 세밀하게 살피고 마음은 넓게 놓아야 한다[文要密察心要洪放]’는 가르침에서 따왔다. 소당(小堂)에는 양정당(養正堂)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니, 주역(周易)어리석을 적에 올바름으로 기른다[蒙以養正]’는 뜻에서 따왔다. 그리고 이 건물을 총칭하여 오계서당(梧溪書堂)이라고 하였다.

오호라! 사람의 재주가 성대하고 쇠락한 것은 비록 운수의 성쇠(盛衰)와 관련되지만 또한 인사(人事)가 그 사이에 엇갈려 섞임이 없지 않다. 옛날에는 학사(學舍)가 흥성하자 사람의 재주도 저처럼 성대했었는데, 학사가 이미 폐해지게 되자 사람의 재주도 이처럼 아득하게 되었다. 비록 학사의 흥성함과 폐함으로 사람의 재주가 성대하고 쇠함을 점침은 가능하지만, 학사를 세우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혹자가 말하기를 “‘날마다 응대하고 접대함이 일이 아닌 것이 없고, 행하고서 남은 힘이 있으면 문장을 배운다고 하였는데, 그대는 하필이면 따로 학사를 세우는 일에 정성을 쏟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그럴듯하나 미흡한 점이 있다. 무릇 사람이 학문을 함에 있어서 집안일이 번다하고 세상일에 매여서 쉽게 뜻을 빼앗겨 공부에 방해가 되는 지경에 이름을 늘 근심한다. 만약 조용하고 한적한 물가에 나아가서 따로 학업을 익히는 곳이 있지 않다면, 또 어찌 학문에 전념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국학(國學)과 향교(鄕校)를 세운 본뜻은 대개 사람을 진작시키고 학문을 일으키는 데서 나왔지만, 과거(科擧)나 법령(法令)에 구애됨을 면치 못한다. 중고(中古) 시대의 서원제도는 현인을 존숭하고 도를 강론하는데 전념할 수 있지만 근래에는 사풍(士風)이 크게 변하여 장난질하는 풍습이 이루어짐으로써 학교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학문에 뜻이 있는 선비가 성현의 뜻을 품고서도 돌아갈 곳이 없을 지경이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그러니 산이나 연못 사이에 따로 학사를 지어서 여러 사람이 거처하며 학업을 익힘으로써 부지런히 학문을 하는 정성으로 급급하게 밖으로 치달리는 마음을 바꾸고,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으로 확충시키고 역사서와 문집으로 넓혀서 조용한 가운데 구두(句讀)나 말씀의 표면을 묵묵히 이해하고 날마다 수작하는 즈음에 체험하고 배양한다면 크게 터득하고 두텁게 축적하여 세상에 시행함에 장차 어떤 곳이든 이롭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만약 심신(心身)을 도외시하고 구이(口耳)를 일삼거나 근본을 경시하고 지엽을 따라서 과거 급제를 통해 말단의 이록(利祿)에 종사한다면 오늘날 일을 함께 도모한 군자들의 바람이 아닐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비루하고 졸렬함을 무릅쓰고 감히 경솔하게 이와 같이 말한다.

 

1744(영조 20) 12월 모일에 기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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